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단 편집) == 파월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 == [youtube(0eIn9jMPjdo)]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보급과 수당 면에서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다.[[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82670426|#]] 미국 정부가 당시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파병 수당을 책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9대 1을 쌈싸먹는 25대 1의 사상자 교환 비율을 비롯하여 파병 한국군의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참전 정글전 베테랑들로 이루어진 [[베트남 전쟁/호주군|파월 호주군]]의 전과에 근접한 수준이다.[* (Stanley Robert Larsen and James Lawton Collins, Jr., 이주만 역, 『베트남 참 동맹군』,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군사참고 제24호,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8)]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내부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정황도 꽤 되며 한국군의 용맹함은 동맹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 한국군보다 높은 교환비를 보인 이들은 최정예 중 최정예만 엄선해서 보낸 [[베트남 전쟁/호주군|ANZAC]]이나 미군 특수부대인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와 [[네이비 씰]], 그리고 이들을 주축으로 한 블랙옵스인 [[MACV-SOG]] 같은 최고급병력 뿐이다. 네이비 씰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서 제 1중대와 제 2중대의 경우, 평균 1대 200이라는 교환비를 냈다.[[http://www.kickassfacts.com/25-kickass-and-interesting-facts-about-navy-seals/|출처]]. 한국군이 잘 싸운 이유로는 첫째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교대할 병력을 보낼 때 전투력 최우수자를 우선적으로 뽑는 식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사령관 [[채명신]] 장군부터 해방 이후 [[6.25 전쟁]], 그리고 전쟁 후에도 오랜 기간 이어온 공산군 잔당인 빨치산 토벌 등의 전훈으로 당시 미군은 거의 경험이 없던 정글, 산악지형의 [[게릴라]]를 상대하는 법을 아주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군이 화력은 대신 해줄순 있어도 베트콩들과 직접 맞닥뜨려 전략적 승리를 하기 위해선 게릴라전 대응이 필요했는데 당시 한국군은 그 실전경험이 충분했던 것. 게릴라는 [[포코 이론|민심을 얻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만큼]] 대게릴라전에서도 [[민사작전|민심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것도 한국은 6.25의 경험을 통해 선례로 배운것이다.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 3,364명, 식량 1만 9,640톤, 의류 46만 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만 2,060명, 경로잔치 및 어린이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등 대민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한국군이 전투력보다 민사작전능력이 더 널리 알려질 정도가 되었으니, 한국군이 베트콩을 상대로 전공이 높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혹자는 한국이 베트남과 똑같이 [[벼]]농사문화권이라서 베트남의 [[농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한국군의 적지 않은 수가 [[농사]]짓던 청년이었다는 점도 대민작전 하기가 쉬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군은 지금도 해외 파병시에 현지주민 진료, 대민지원사업을 우선시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민사작전은 유엔에서도 인정받고 있고 현재 민사작전에서는 세계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군은 원래 구식 무기인 [[M1 개런드]]를 들고 있었으나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 소총]]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전군이 M16 등의 신예 미군 병기로 무장하였다.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화력에서도 미군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 싸우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초창기에는 미군의 [[헬리콥터]]나 포병지원을 잘 안 해준 데다 한국군에게 주둔지역을 넘기고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나와서 꽤 어려움을 겪은 면이 있다. 이는 채명신 장군과 미군이 한국군의 소속 문제와 작전권 문제로 크게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채명신 장군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한국군이 미군의 예하 병력으로 들어가버리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소속과 작전권 문제를 절대 미군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전쟁 초창기, 해병 청룡부대의 첫 대규모 작전 "청룡 1호" 작전이나 맹호부대의 "비호 6호" 작전은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이 었다. 물론 후반부 대규모 작전도 한국군의 단독 지휘와 한국군 위주 작전이었지만 미군 헬리콥터 지원은 기본이었다. "청룡 1호" 작전은 투이호아의 혼바산 등의 험난한 산악전을 벌여야 했고 고지나 산 속에 숨어있는 [[베트콩]] 기지들을 산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자 미군들이 대대적으로 지원을 해주기 시작한다. 후반 작전들에서는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의 [[헬리콥터]]를 타고 고지에 투입된 병력이 함께 앞뒤에서 적을 포위시켜 섬멸하면서 더욱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주월 한국군은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 등의 임무가 많았다. 따라서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부수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게릴라 소탕이라고 하는 게 헬기로 공중강습하고, 미군의 빵빵한 화력지원에다가 포위망도 갖춘 정교하고 대대적인 작전인 데다가 영내수비란 것도 따지고 보면 [[두코 전투]]나 [[짜빈동 전투]]처럼 스케일이 크기도 하다. 또한 본래 점령전이 아닌 베트남에서는 사방이 베트콩으로 둘러싸인 전장 환경(지상전 한정)상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특수부대]]의 월경 작전도 따지고 보면 정규전을 치르려는 게 아니라 게릴라 활동을 차단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구정 공세]]도 게릴라전의 스케일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고, 케산 전투도 영내수비가 엄청나게 큰 판으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군은 베트콩 이외에도 [[두코 전투]], [[안케패스 전투]]나 짜빈동 전투 등 월맹 정규군과 여러 차례 교전한 끝에 전과를 올림으로써 실제 정규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냈다. 그 외에도 주월 한국군은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1-1호 작전, 백호 9~12호 작전, 홍길동 작전 등 월맹 정규군과 주월 한국군이 전투를 치른 사례가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짜빈동 전투]]'는 국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라 할 수 있다. [[http://yack_x.blog.me/185381830|#]] 안케패스 전투의 경우는 베트남군을 다시 쫓아내기는 했지만 짜빈동 전투의 승리 방식을 그대로 돌려받은 졸전의 사례에 가깝다. 따라서 당시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자기 가치를 드러냈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 지원을 토대로 승전을 거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를 치르는 주체는 한국군이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무용담은 군사정권하에서 과장 및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측에서는 주로 베트남전을 시찰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낸 해병대 청룡부대(2여단)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그 근거로 드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대한민국 해병대]]는 주요 전투에서 베트콩 등 적들에 대한 주요 군사행동을 주도적으로 취하기를 꺼렸으며 미군과 제대로 된 작전연계를 펼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특히 이 평가는 한국 해병대에서 같이 근무한 많은 미해병대원들이 반박했는데, 특히나 ANGLICO(미해병 항공함포 연락반)대원들은 한국 해병대 중대에 배속되어 같이 생활했으며 "처음에는 언어 장벽으로 대화가 힘들었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를 믿게 되었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이다."라고 증언할 정도였다. Thomas Petri 나 Scott Leis 등 대원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청룡부대원들과의 생활을 책으로 출간했다. 다만, 당시 주월 한국군이 채택했던 [[중대전술기지]]의 교리 자체가 극단적으로 공세적 군사행위를 배척하는 특성을 보이므로 완전히 이해 못할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당장 제안자였던 [[채명신]] 장군 이외에는 아무도, 심지어 같은 한국군 장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 나온다. > *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살이 빈번하였으며 베트남 농민은 베트콩보다 한국군을 더 두려워하였다. > * [[암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거나 물건을 훔치고 현지를 약탈하는 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였다. 보다시피 제임스 맥은 한국군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에 대해 [[채명신]]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다만, 암시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일부 인정했다. > * 베트남전의 성격 규정에서부터 한국군에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를 허용할지 여부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두고 주월미군과 주월한국군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 * 미군이 아시아문화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게릴라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나중에는 한국군이 채택했던 전술개념 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 * 해병대의 경우 적극적인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 오히려 참전 초기 성급하게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베트콩들의 매복이나 기습공격에 다수가 사망한 사건 등을 허위보고하는 사례도 발견돼 3명 이상의 적군을 추격할 때는 사령관의 허가를 받으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 또한 제임스 맥의 평가는 해병 2여단 중 꽝남 성 이남 지역의 해병대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있는 것이므로 모든 한국군이 이렇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미국 자료들은 대체로 한국군의 군사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Department of the Army(1985), 저자(Larsen, Stanley). [[http://www.history.army.mil/books/Vietnam/allied/ch06.htm|#]] 이 책은 미군의 공식 평가로 제임스 맥이나 다른 고문관의 평가까지 합쳐서 낸 종합 평가다.] 또한 제임스 맥은 외교 고문관이자 민간인이지 군사 고문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군사 고문관들은 한국 해병대가 적극적이면 너무 적극적이지 절대로 소극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암시장과 비리에 관한 관한 문제는 무기를 팔아먹는 것보다는 빈약한 지원 때문에 더 사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군수부대에서 근무한 한국군과 미군 참전용사들에 따르면 초반에 [[M16 소총]]을 보급받지 않고 빈약한 [[M1 개런드]]나 카빈 소총을 받은 한국군은 암시장에서 몰래 무기를 사오는 경우도 있었고, 신형 소총을 더 보급받기 위해 다른 부대에 빼돌려 버리고 전부 손실했다고 거짓말을 한 뒤 보급을 더 받은 일화도 유명하다. 또한 M113 [[장갑차]]도 비슷한 방법으로 보급을 더 받았으며 결국 국내로 밀수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쓰라고 미국이 공여한 무기들을 몰래 빼내 국내로 밀수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미군이 국군의 물자 이동을 감시했다는 말은 전형적인 인터넷 카더라고 [[M113]] 항목과 [[한국군 방산무기 수입사]]에서 언급되어 있다. 실제로는 그 400여 대는 본토의 국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측에서 정식 지원해 준 것이다. 더구다나 밀수했다는 장비들 역시 미국 측에서 대부분 수량을 파악하였으며, M113와 마찬가지로 국군에게 공여된 장비 물량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적었다고 한다. 어차피 한국군은 본 전쟁에서 [[베트콩]]을 주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무기를 팔아먹으면 바로 적의 손에 들어가는데 개인이 무기를 팔 이유도 없었고 부대단위로 신형 무기를 다 팔아버리는 막장스러운 사태도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가뜩이나 군기와 구타가 심한 1960년대 군대에 군인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팔아버리면/잃어버리면 끝장인 걸 모를 수가 없다. 다만 씨레이션이나 텔레비전, 냉장고 등 남은 것들을 군사들이 빼돌리거나 암시장에서 구입하여 집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6.25 전쟁]] 이후에 한국에서 미군 생필 군수물품들이 암시장에서 팔린 것과 비슷하게 베트남 암시장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팔렸다. 엄밀히 말해서는 불법이 맞지만 베트콩들에게 무기를 팔아먹는 미친 짓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 얼마나 한국이 가난했는지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사상자 비율이 1:24로 미국의 1:9보다 크게 앞선다는 것 역시 미국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 The ROKs very much favored small unit operations, aggressive offensive raids on isolated targets, offensive ambushes, especially at night, and, because of their martial arts expertise, they felt they had a distinct advantage in close hand-to-hand combat, which was most certainly true. > 한국군은 소부대 작전과 고립된 표적에 대한 호전적인 공세적 습격, 공세적 매복, 특히 야간매복을 매우 선호했다. 무술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백병전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이는 명백히 사실이었다. > > They appeared to have a natural nose for picking up enemy weapons that were, as far as the enemy thought, securely cached away. Considered opinion was that it was good the Koreans were "friendlies." > 베트콩이 안전하게 숨겨놓았다고 생각한 무기들을 찾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한국군이 동맹군이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의견이 주류였다. > > An analysis of the over-all Korean contribution to the pacification program leads to the conclusion that Korean combat forces had their greatest success with small unit civic action projects and security operations within their Korean tactical area of responsibility. Complete success eluded the Koreans, however, because of their insufficient coordination and co-operation, and the initial impression they made in dealing with the Vietnamese. > 한국군의 담당 지역 안정화 작업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면 한국군은 작전 담당 지역에서의 소규모 대민지원 및 보안 작전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만 한국군의 성과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는 한국군의 내부조율 및 외부협력이 부족했던 점과, 현지인들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제임스 맥이 그렇게 폄하하는 해병대가 바로 1:24 사상자 비율의 주인공이다. [[http://www.usarpac.army.mil/history2/history_jan.asp|#]] >During Operation VAN BUREN, one the Korean platoons of about 13 Marines wipes out an elite North Vietnamese Army (NVA) regiment. There are only two Koreans dead and more than 400 NVA soldiers dead. The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boasts a kill ratio of 24 to 1 in the Vietnam War. > Van Buren 작전 중 한국군 소대들 중 약 하나인 약 13명의 한국 해병들로 구성된 소대가 정예 월맹군 연대를 섬멸했다. 해병들은 2명을 잃었지만 400명 이상의 월맹군 사상자가 났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24 사상자 비율을 자랑했다.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제국군과 정글에서 싸운 [[호주]]의 베트남 파병병력의 전과에 근접한 수준이다. [* (Stanley Robert Larsen and James Lawton Collins, Jr., 이주만 역, 『베트남 참 동맹군』,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군사참고 제24호,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8)] 그리고 이런 평가들이 과장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 오히려 한국군 전투부대는 미군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특히 미군 전투부대원들과 같이 작전을 펼친 적이 많았다. 청룡부대의 경우 [[여단]] 규모라 담당지역을 이동하는 편이었다.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서 베트콩을 소탕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싸웠다. '깜란, 투이호아, 추라이, 호이안'. 그리고 평정 후 맹호부대나 백마부대에게 인계되는 식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푸옌성과 칸호아성은 청룡부대가 이동 후 백마부대의 담당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지원이 많이 필요했고 그 지원을 미군에서 받았다. 그러므로 합동작전뿐만 아니라 개개인 전투병들과의 교류도 많았으며, 그들에게서 명성도 아주 높은 편이었다. 특히 [[미 해병대]] 항공함포연락반(ANGLICO) 인원들이 청룡부대 전투부대 [[중대]]마다 배속되어 수많은 교전을 같이 겪었고 짜빈동 전투에도 ANGLICO 미해병들이 두 명이나 같이 있었다. 이들이 한국군 해병대와의 경험을 해외 베테랑 커뮤니티에 알렸고 대부분 월남전 당시 한국 해병대의 긍정적인 평가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제임스 맥이 평가한 청룡부대, 특히 꽝남 성에 주둔한 부대는 미군들과의 교류가 수없이 많았고 오히려 그들의 평가는 아주 긍정적이다. 물론 맥의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직접 같이 싸우고 작전을 펼친 전투병들과의 평가는 그와 정반대이다. 물론 무조건 승리한 것만은 아니다. 공식적인 기록에도 남아있지만 한국군은 부대 규모상 미군이나 월남군처럼 정규 월맹군 상대로 대규모 작전을 실시한 적은 별로 없다. 있긴 있었으나 그렇다고 많지는 않았다는 것. 안케패스 전투 등. 또 연대-여단 규모 작전이 그나마 큰 편이었다. 오작교 작전이나 홍길동 작전, 황룡 작전등 스케일이 큰 작전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소규모 교전과 [[매복]]이었다. 이 가운데 큰 성과를 얻었지만 매복이나 [[부비트랩]]으로 손실을 겪은 적도 꽤 있다. 이에 대해서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는 승전보만 알리려고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은 사례에 대해서는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오히려 파월용사들의 수기로 가슴 아픈 사례들이 밝혀진 바가 있다. 예를 들어 짜빈박 전투는 "투망 작전"의 한 부분으로 해병대가 손실을 겪은 전투였지만 국방부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럭저럭 성과를 얻은 작전이기 때문에 작전 기간에 모든 전과만 언급하고 "부분적 성공"이라 칭한 뒤 그 특정 전투는 넘기는 식이었다. 또한 오작교 작전에서 백마부대의 도깨비 11중대가 보초병이 조는 바람에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은 사건이나 맹호부대의 혜산진 1대대 2중대에 베트콩이 침투하여 막사에 [[수류탄]]을 다수 투척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작교 작전 자체가 큰 성공이라는 이유로 전과만 홍보하고 다른 건 싹 덮어버리는 면도 있었다. 안케패스 전투 경우도 한국군이 이기기는 하였으나 사령부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점도 참전용사들의 수기에 의하여 밝혀졌다. 공식적으로는 북베트남군 700여명을 사살했고 한국군 전사자가 70여명에 부상자가 100여명이라고 하지만 일부 참전용사들은 그보다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사살한 북베트남군의 수도 다소 과장되어 있는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일단 638고지 전투에서 436명을 사살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의 진위여부가 상당히 의심스럽기 때문. 확인된 시체는 4구이며 나머지 시체는 어떻게 들고 탈출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해당 거점에 900여명은 있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게다가 공격해서 부상자 없이 사망자만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들이 시체를 들고다니지는 못할테니 이것까지 고려하면 연대급 인원까지 들어가있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군 참전용사들이 한국군을 바라본 시선도 독특하다. 당시에 군기와 가혹행위가 심해서 옆에서 보던 미군 참전용사들이 "하드코어하다"라며 손을 저을 정도였던 반면, 우리도 저렇게 해보자라는 [[싸이코]]들도 있었다는 것. 그러나 안그래도 사기도 낮고 사명감도 없던 미군 병사들이 그런꼴을 당하면 [[프래깅]]으로 갚아줬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당시 미군들은 징병되어 원치 않아도 끌려온 반면, 한국 파월장병들은 지원을 받아 선발해서 보낸 병사들이라 꽤 정예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국측 장교단이 한국측 진지를 방문했을때, 병영을 안내하는 한국군 장교들이 지나갈 때마다 쉬고 있던 한국군 병사들이 큰 목소리로 충성! 하고 외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고, 그다음부턴 "우리도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부러워 했다. 그런데 정작 전투 지역에 있던 미군 장교들은 부하들에게 경례하지 말라고 지시하는데, 베트콩 [[저격수]]에게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도 이와 관련된 장면이 있다. 자세한 항목은 [[경례구호]] 항목 참조. 당시 미군 1기병사단 중위였던 리처드 머레이는 사소하게 한국군 초소나 진지를 지나가면 병사들이 득달같이 일어나 자로 잰 듯한 경례와 떠나갈듯한 경례 구호를 외쳤고 본인도 경도되어 군인다운 자세로 답례했다고 한다. 머레이는 맹호부대 연락장교였고 2009년 타계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군은 뜀걸음시에 힘차게 군가를 부르는 전통이 있고 생활화되어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다. 당시 미군은 기상과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집결하여 군가를 부르며 뛰는 한국군을 보며 스페셜포스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이라크 주둔 [[자이툰 부대]]에도 이어진다. 당시나 현재나 미군은 아침조회식으로 끝내기 때문. 보통 미군도 케이던스라 불리우는 완보시 군가를 부르긴 하지만 한국군 식으로 속보에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